친구와 함께 듣던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 예전 그, 또는 그녀와 함께 했던 많은 일들이 떠오르게 된다. 98년 친구와 함께 생활했던 대학 1학년 시절... 만약 현재의 내가 차를 앞에 두거나 음악을 들을 때 그립다고 생각하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글의 전체적인 내용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느끼는 친구와 함께 듣던 음악과 같이 차와 함께 그리움 또는 추억을 함께 했던 선배를 통해 화자가 알고 있는 그리고 차를 통해 비쳐지는 많은 것들, 그리고 차의 종류까지 차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해 주는 차를 매개체로 한 친근한 편지형식의 글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커피를 비롯해 다양한 차를 즐긴다. 웰빙 바람이 불며 건강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은 특히 녹차의 소비량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신문보도에서도 본적이 있다. 하지만 단지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내가 느끼는 차에 대한 느낌에서 단지 건강을 위해 마시는 정도의 차라 생각되지는 않고, 이렇게 느껴지게 하고 싶지도 않다.
특별히 좋아하는 차나 즐겨 마시는 차는 없지만 건강과 미용정도로 머물고 싶지 만은 않은 나에게 차가 가져다주었던 작은 추억정도의 차라면 아주 오래전에 마셨던 차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언급했던 자스민차가 나의 기억 속 가장 추억이 담겨 있는 차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 1학년 말 날씨가 지금처럼 날씨가 따뜻하지 만은 않았던 정말 추웠던 겨울, 남원에서 한 여자 선배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식사를 마치고 선배가 내밀었던 향이 좋았던 자스민차 그 차를 마시며 대학시절에 학교생활을 시작 할 때의 마음가짐과 1년을 마치며 내가 해왔던 많은 것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서 그 선배와 함께 나누었던 많은 따뜻했던 추억의 대화들... 현재 내게는 되돌아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시간이기에 너무나 소중한 느낌, 그리고 좋았던 추억으로 기억되지 않나 싶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차에 대한 작은 추억 정도라면 이렇듯 실제로도 작은 추억일 뿐이다. 차는 정말로 나에게 어떠한 추억을 가져다 주었는지.. 좋은 추억의 한편에서 차가 있는지 사실 정확하게 꼬집어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와 함께 나눈 기억은 단편적이며 너무나도 적지만, “혼자서 차를 마실 줄 알면 신령스러운 경지를 깨친 것이요, 둘이서 함께 차를 느낄 줄 알면 삶의 으뜸가는 정취(情趣)라고 들었습니다...” 라는 내용을 읽으며 차는 나에게 추억 속에 단지 하나의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닌 나에게 작은 여유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미소를 지으며 생각되는 가장 소중했던 추억들, 여자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며 아웅다웅 하며 보내던 시간들 정말로 내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추억의 시간들이다. 하지만 현재는 내일의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된다는 말에서 미래를 제외한 많은 시간들은 모두 과거가 되버리기에, 그리고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우리의 맘속에서 항상 그 시간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마지막으로 ‘차 한 잔에 띄우는 그리움의 편지’를 읽으며 느낀 것은 나의 차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했던 추억의 시간들과 차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새롭게 배워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듯 하고, 차라는 것이 거대한 것도 아닌 단지 보살님의 작은 미소처럼 나에게도 작지만 아름다운, 그리고 단지 건강만을 위해 마시는 차가 아닌 소중한 추억의 매개체로, 작은 여유라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차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은 시간이 되었던 것이 ‘차 한 잔에 띄우는 그리움의 편지’ 를 읽으며 느꼈던 것이 아닐까 생각 한다.
#차 한잔에 띄워보는 그리움의 편지#
깊은 밤입니다. 어느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 앉아 선배님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쓰다말고 차 한 잔을 다렸습니다. 정성껏, 아주 정성껏 차를 다렸습니다. 그윽하게 피어오르는 다향(茶香)을 오래 오래 음미하노라니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군요. 추억의 항아리에 묻어둔 지난 세월의 그리움을 조심스레 꺼내봅니다.
싸락눈과 대나무 숲, 바람의 인연을 생각하며
선배님. 싸락눈 내리는 대나무 숲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긴 대나무 숲을 스치던 그 신비스러운 바람 소리…. 바람이 지나간 대나무 숲은 아무런 소리도 남기지 않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차 한 잔을 천천히 마시며, 저는 소리를 듣습니다. 싸락눈과 대나무 숲, 그리고 바람의 그 인연을 생각하며 산사에 찾아온 밤의 소리를 듣습니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 계곡 소나무 가지 사이로 무심히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대나무 숲을 스쳐 지나간 그 때의 그 바람소리처럼, 조용히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져 가는 자연의 소리를 듣습니다.
다시 차 한 잔을 다려내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색과 향과 그 맛을 음미해봅니다. 아, 이번에는 정말 잘 우러나왔네요! 무척이나 고운 색깔입니다. 향기도 참으로 기막히군요. 그래요, 바로 이런 느낌이었죠.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 언제나 아주 좋은 차를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침체에 빠져 황폐해가던 영혼에 맑은 샘물이 부어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삶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 묻어나는 글, 언제나 생각하며 살아가는 선배님의 존재는 저에게 참으로 큰 행복이었습니다. 늘 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시곤 하셨죠. '중국 문학의 대중화'가 꿈이라는 저의 이야기에, 꼭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미리 어린아이처럼 기뻐해 주던 선배님…. 건강하시죠? 잘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요즈음 정말로 아주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낸답니다. 선배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마냥 게으를 수만은 없는 노릇이기에….
알고 보니 불교와 차는 정말 깊은 관계가 있더군요. 시(詩)의 세계에 두보(杜甫)와 같은 성인(聖人)이 있고, 술과 낭만의 세계에 이백과 같은 신선이 있듯, 차(茶)의 세계에도 신선이나 성인처럼 추앙 받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성(茶聖), 또는 다신(茶神)으로 불리우는 당(唐)나라 때의 육우(陸羽) 말입니다. 그의 일생이나 그가 차 문화의 형성에 미친 엄청난 공적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고아였던 그가 절에서 자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교와 차의 깊은 인연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요.
당나라 때 조주(趙州) 관음사(觀音寺)에서 공부하시던 고불(古佛) 선사의 끽차(喫茶) 이야기도 너무나 유명하지요.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똑같은 답변, "차나 한잔 마시게…" 하셨다지요? 그리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불자들의 천년 공안(公案)이 되었다 하니, 선사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만, 불교와 차의 각별한 관계는 적어도 선배님과 나의 인연 정도는 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성(茶聖) 초의(草衣) 선사와 해남 두륜산 일지암 이야기, 그 외에도 스님들과 얽힌 수많은 차의 사연들…. 드디어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에 대해 언급이 되면, 참으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감히 무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상(諸相)은 허망하지만 상(相)이 없는 것 또한 허망하다고 들었습니다. 산사의 깊은 밤, 홀로 차를 마시면서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몇 글자 낙서해 보고픈 마음일 따름입니다. 언어의 그물 망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채 떨리는 이 번뇌의 울림을….
차는 명상 아닐까요? 늘 깨어있는 것이지요. 각성의 세계인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은 일념(一念)의 차이라 배웠습니다. 일념이 어리석으면 반야의 모든 지혜가 사라지고, 일념을 깨치면 다이아몬드와 같은 찬란한 지혜가 빛을 발하니, 성불의 관건은 바로 생각 하나의 차이에 있다 하였던가요? 이 그윽한 한 잔의 차에 그 일념의 절벽을 뛰어넘게 하소서….
차는 안목 같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말입니다.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말했죠. 삼라만상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피카소가 말했다지요? 그림은 보는 사람의 몫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 보는 사람의 것이죠. 그림을 올바로 감상하듯, 이 세상을 올바로 보는 안목을 배우고자 합니다.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복, 선과 악 등등 그 모든 이분법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작은 시각을 버리고 세상을 보다 폭넓게, 초월과 달관의 거시적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 그윽한 다향(茶香)으로 마음을 추스르게 하소서. 영혼의 눈을 뜨게 하소서….
차는 합장(合掌)인 듯도 싶었습니다. 삶이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여행. 어느 순간, 운명에 의해 차단 당할 때 우리는 때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요. 그러나 길을 다시 떠나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에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절망도 이내 사라집니다. 새로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우리의 여행길에 화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꽃비가 춤을 춥니다.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에 경건히 합장하며 우주를 생각합니다….
차는 열반(涅槃)인 듯도 싶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아찔한 절벽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의 순간, 텅 빈 가난한 마음만이 우주에 남아있는 해탈의 세계를 엿보는 순간입니다. 아, 몇 번이나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야 그 순간이 찾아올까요… 그 순간에는 정녕 백팔 번뇌가 스러질까요….
그러나 차는 명상도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는 초월의 철학적 시각도 아니고,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경건한 합장도 아니고, 부처님의 해탈과 열반도 아닌 듯 합니다. 차는 아마도 보살님의 미소인 것 같습니다. 이 산사에 계신 큰 보살님의 그 순박하신 미소 말입니다. 그 분은 차를 안 드십니다. 아니, 못 드신답니다. 차를 마시면 잠이 안 와서 힘들다고 말씀하시며, 조금은 부끄러운 듯 허허, 소탈하게 웃으십니다.
그렇죠. 술 취한 사람, 탐욕에 잠들어있는 사람에게는 "차나 한 잔 마시게", 맑고 청량한 차 한잔이 꼭 필요하겠죠.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지내시는 분에게 구태여 차가 필요할라구요? 부끄러운 마음으로 차나 한 잔 마시면서, 차를 마시지 않는 그 보살 님의 따스한 미소를 생각합니다. 그 미소를 빙그레 배워봅니다. 모지 사바하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생명의 나무#
선배님. 계곡 사이로 어스름 피어오르는 안개가 새벽을 깨우고 있군요. 먼동이 트고 있습니다. 제 연구실에 걸린 산수화 그림처럼 말이죠. 깎아지른 낭떠러지, 점점이 이어진 낙락장송, 기암괴석 사이를 흘러나오는 계곡 물, 그리고 깊은 산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사의 새벽 종소리…. 나그네는 강가에 정박한 나룻배 안에서 무심히 그 종소리를 듣습니다. 선배님도 언젠가 제 연구실에 왔을 때, 그 산수화를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저는 언제나 그 그림을 바라봅니다. 마음이 당기는 날이면 아껴두었던 오룡차를 정성껏 다려내어 혼자서 천천히 음미해보며 한가로운 여백의 마음을 배워봅니다….
선배님은 어떤 차를 좋아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제일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차는 녹차(綠茶)이겠죠. 대부분 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음료수 차원에 머물고 있지요. 하지만 차 마시는 행위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다도(茶道)의 대상도 녹차랍니다. 그런 건 물론 수행 깊은 선사(禪師)께서나 드셨음직한 고품격의 작설차(雀舌茶)와 같은 녹차이겠지만.1)
저는 오룡차(烏龍茶)와 같은 청차(靑茶) 계통의 차를 좋아합니다. 녹차와 청차가 어떻게 다르냐고요? 글쎄요, 전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그러한 과학적인 분류법은 왠지 들을 때마다 자꾸만 잊어버리는군요. 그저 오룡차와 벗하며 지냈던 지난 세월의 단상(斷想)을 모아 선배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따름입니다.
차는 물로 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맛이 좋아야 차 맛도 좋습니다. 그래서 천하 제일의 약수가 어떤 것이니, 어떤 물로 다려야 차 맛이 제일 좋으니,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거겠죠. 거기에 제 이야기를 하나 더 보태어 그러한 물맛에 차 맛을 비유해보면 어떨까요?
제 경험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월출산 기슭, 왕인 박사 유적지의 물맛이었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 한 모금 마시면 쨍그랑∼ 청아한 금속 소리가 들립니다. 정신이 번쩍 차려집니다. 신령스런 월출산 기암괴석의 정기가 단숨에 정수리에 가득 차 오릅니다. 이윽고 호수의 파문처럼 조용히 온 몸에 퍼져 가는 해맑은 기운! 그 황홀한 느낌은 정말 예술이었습니다. 오룡차는 그 월출산 석수, 예술의 물맛 같다고나 할까요?
그에 비하면 백마강을 굽어보는 부여 고란사 물맛은, 그저 물맛 그 자체였습니다. 저의 아둔한 감각으로는 음미하기가 너무 어려웠죠. 구태여 말하자면 철학적 물맛이라고 해야 되나요? 사색과 명상을 사랑하는 분들은 그러시더군요. 물맛은 아무 맛이 없어야 최고라고요. 녹차는 그런 고란사 물맛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에 가까운 담백한 그 맛…. 곰곰이 음미하노라면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지는 느낌입니다. 정말로 참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 아하, 이래서 다선일여(茶禪一如)라는 말이 나온 거로구나, 싶지요. 철학과 예술! 선배님은 어떤 물을 더 좋아하시나요?
차는 불로 다려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기로는 숯불처럼 은은한 불이라고 합니다만, 차를 다릴 때마다 매번 그런 호사를 부리기가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그저 물의 온도나 제대로 맞추어 차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잃지 않게 노력해볼 따름이지요.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생명의 나뭇잎에서 형편없는 풀 냄새만 풀, 풀, 풍겨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물의 온도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는 일은 차의 그윽한 맛과 멋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행위겠죠?
아시다시피 오룡차와 같은 청차는 끓는 물에서 펄펄 끓는 그 기운만을 살짝 없애준 아주 뜨거운 물을 사용하지요. 이를테면 반쯤 발효되어 잠들어 있는 차 잎을 순간적인 쇼크 요법, 아주 뜨거운 물로 순식간에 깨운다고나 할까요? 오룡차는 뜨겁게 태어나 뜨겁게 인생을 살다 간 정열의 예술가입니다.
그에 비해서 녹차는 물의 온도를 아주 뚝 떨어뜨려야 한다는군요. 싱그러운 녹차 잎은 입술에 따스한 기운만이 전해질 정도의 온도 안에서 아주 은은하게, 자신이 내재한 색과 향과 맛의 가치를 천천히 퍼뜨리지요. 그 따스함을 조금씩 입안에서 음미하면, 오로지 수행만을 삶의 유일한 일과로 삼으신 스님의 담백한 일생을 살짝 엿보는 그런 느낌입니다. 선배님은 어떠한 삶을 더 사랑하십니까?
차는 또한 다구(茶俱)로 다려내는 것이기도 하지요. 다호(茶壺)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녹차를 다리는 다관(茶罐)은 유약이 발라진 도기입니다. 흙은 생명이 있는 물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다리는 주전자에 유약을 바른다는 건 생명을 차단하는 행위가 아닐까 싶어 왠지 아쉬웠지요.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욕망을 차단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의지로 이해하는 게 더 올바른 해석일 듯도 싶었습니다. 선배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청차를 다리는 다호는 비교적 작은 크기, 유약을 바르지 않은 토기이죠. 살아있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청차는 이 작은 우주 속에서 그와 함께 호흡을 주고받습니다. 서로 하나가 됩니다. 그 때 다호는 차 잎의 향과 맛을 자신의 안 깊숙한 곳에 내재시키는 거죠. 그래서 좋은 차를 많이 다려냈던 다호로 차를 다리면, 차가 그다지 좋지 않아도 차 맛이 기가 막히게 우러나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머금어두었던 그윽한 향과 맛을 토해내기 때문입니다.2)
그렇게 다려낸 차는 찻잔으로 마십니다. 녹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다구(茶俱)는 큼직합니다. 차를 다려내는 다관도 크고, 마시는 찻잔도 큽니다. 욕망의 강을 건너 저기 깨달음의 피안(彼岸)으로 향하는 자비로운 대승(大乘)의 뗏목일까요…. 오룡차를 마시는 찻잔은 앙증맞게 작습니다. 그러나 홀로 강을 건너는 독각(獨覺)의 구도자, 그 소승(小乘)적 삶의 모습은 아닌 듯 합니다. 비록 그 뗏목은 작지만 너무나 예술적이니까요. 오룡차를 마실 때는 품명배(品茗杯)로 맛을 감상하기 전에 먼저 운두 깊은 문향배(聞香杯) 찻잔 속에 다향(茶香)을 모아두고 한껏 그 향기를 음미하지 않습니까? 그 향기를 맡을 때면 저는 언제나 저만의 아늑하고 조용한 정원에서 거문고와 시서(詩書)를 즐기는 단아한 선비가 되는 듯한 즐거움을 맛봅니다.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정도 삶의 호사를 누리는 건 지나친 사치일까요?
차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변화하는 생명입니다. 차는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나무, 바로 우리들 '삶의 나무'이죠. 특히 오룡차는 한 잔 한 잔에 서로 다른 사랑과 낭만,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녹아있습니다. 매번 차를 뽑아낼 때마다 맛이 다르지요. 상등품일수록 여러 번 차를 뽑아낼 수 있는데요, 처음 서너 번은 그 때마다 독특한 맛이 난답니다.
첫 번째는 상큼하고 싱그러운 느낌.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 조금이라도 잘못 다리면 너무나 쓴맛이 나지요. 청춘은 독버섯! 사춘기의 설익은 고민을 연상시킵니다. 두 번째는 달콤하고 화려한 장미의 화원이랄까요? 여름 해변, 이십대 젊은이들의 축제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아직 깊이와 여운은 좀처럼 느낄 수 없지요. 장미의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어느 서양 시인 생각도 나는군요…. 진짜 제대로 된 차 맛은 그러므로 세 번째 다려낼 때부터랍니다. 머리끝까지 퍼져나가는 맑고 그윽한 기운이 삶의 찌든 때를 조용히 씻어주는 느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앉은 나의 사랑하는 누님, 그 원숙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하죠. 정말로 좋은 차는 이 세 번째의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한다고 합니다.
차의 가치는 정성(精誠)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간절함입니다. 좋은 차라고 해서 무조건 그 황홀한 세계가 펼쳐지는 건 결코 아니니까요. 차 맛은 뭐니뭐니해도 다려내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지요.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고자하는 간절함으로 차를 다려야 합니다.
섬세한 영혼의 촉각으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야 합니다. 흙으로 빚어진 다호와, 뜨거운 불로 끓여낸 물과, 생명의 차 잎이 하나로 만나 혼연일체가 되는 그 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선배님. 저는 언제나 그 경지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그 간절한 정성을 오늘도 새롭게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차는 필경은 마시는 사람의 것이죠. 차는 분위기를 몹시 탑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 실처럼 보일 듯 말 듯 흩날리는 안개비. 그 조그마한 날씨의 변화에도 그 맛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니 하물며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견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차를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의 여행길 연도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해도, 피곤에 지친 나그네가 영혼의 눈을 감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 한잔에 담긴 가치를 가슴으로 절실하게 공감하는 다우(茶友), 선배님과 같은 벗님은 바로 우리 삶의 지기(知己)입니다. 보배입니다….
차의 의미는 여백(餘白)입니다. 쉬어 가는 생명의 휴식 터입니다. 파스칼이 말했다지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에서 비롯한다고. 피에르 쌍소가 쓴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오룡차와 함께 음미하며 읽어야 제 격인 듯 싶습니다. 도연명(陶淵明)도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말했습니다. 힘차게 나아갈 때가 있으면 조용히 쉬어갈 때도 있어야한다고요. 무위자연(無爲自然)…. 봄, 여름, 가을, 겨울…,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고 멈추는 대자연의 진리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선배님. 무심히 새벽의 골짜기를 나서던 구름이 문득 발길을 멈추고 먼 곳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군요. 구름이 쉬어가는 저 여백의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봅니다…. 아무래도 새로이 오룡차를 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맑은 새벽의 법당 안에서 한 잔, 한 잔을 새롭게 다려내며,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리는 여백의 시간을 가져야 할까봅니다. 선배님도 차 한 잔 더 나누지 않으시렵니까?
1) 중국인들은 커다란 찻잔에 차잎을 집어넣고 몇 번이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음료수 대용으로 마신다. 이렇게 마시는 것을 '소가 꿀떡꿀떡 물 마시는 것' 같다하여 '우음(牛飮)'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특히 중국 강소성(江蘇省) 태호(太湖) 서쪽의 의흥(宜興)에서 출토되는 자사(紫砂)로 만든 <의흥 다호>가 유명하다. 이 다호는 처음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흙 그 자체이지만, 차츰 차 기름을 먹게 되면 점차 유약을 바른 것처럼 윤이 나게 된다. 특히 매일 정성껏 조심스레 문질러주면 마침내 속눈썹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거울같이 반지르르 빛나는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다호를 길들이는 과정을 '양호(養壺)'라고 한다. 인간의 사랑으로 흙의 생명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다호는 그야말로 자손만대에 길이 전해지는 보물이다. 국보급으로 인정된 이러한 명품 다호들은, 오늘날 의흥 다호 박물관에 진열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꼭 한번 가보시길…
#아름다운 인간 관계, 당신은 누구십니까? #
선배님. 아침 공양을 마치고 다시 법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멀리서 다가와 산사를 깨우고 있는 아침은 아직도 한 폭의 동양화입니다. 포근한 햇살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와 부처님께 조용히 합장을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화목한 아침입니다. 멀리 밭일을 나가시는 큰 보살님의 모습이 보이는군요. 하루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살님처럼 저도 일상 생활로 돌아가 또 다시 열심히 지내야겠습니다. 음, 그런데, 어쩐지 좀 서운하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차를 다려볼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몇 잔 더 마시며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내일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인지, 미리 곰곰 헤아려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침 분위기와 잘 어울릴 듯 싶은 상큼한 포종차(包種茶)를 한번 다려 볼까요? 왠지 예감이 좋군요. 차가 아주 잘 우러나올 것 같습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향기가 법당 안을 하나 가득 휘감아 돕니다. 아, 이 그윽한 맛이라니! 한 모금 마시니 온 몸이 따스해지는 느낌! 너무 좋군요…
오늘 오후에는 중국문학 강의가 있네요. 도연명의 전원시(田園詩)를 강의할 차례입니다.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따노라니/ 아아, 유유자적함이여! 남산이 보이누나!(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임진자득(任眞自得)의 경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때 유토피아의 세계가 저절로 찾아온다는 그 시구(詩句)를 저는 정말 사랑합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학생들 몇 명이 수업 시간 전에 제 방에 찾아오기로 하였군요. 하하, 그 친구들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글쎄, 지난번엔 제 연구실에 찾아왔길래 오룡차를 한 잔씩 주었거든요?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차는 안 마시고 한참동안 잔만 빤히 들여다보면서 망설이잖아요. 왜 그러나, 살펴보니 잔 안에 조그만 차 잎이 하나 빠져있었습니다. 그 녀석, 그 때 한 마디 하는 게 걸작이었죠. "저―, 선생님, 이 건더기도 먹는 건가요?" 하하, 얼마나 귀엽던지요! 저도 대꾸해 주었죠. "아니, 국물만 먹으렴!"
차는 평범한 우리들 생활 속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는 생명의 나무라고 해서, 명상과 사색의 철학자나 사랑과 낭만의 예술가만이 즐기는, 뭔가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겠어요? 차는 우리들의 인간 관계를 도탑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사랑의 메신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즐겁고 재미있게 웃으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일상 생활, 그 자체입니다.
선배님. 생각나시나요? 옛날 유학 시절. 기숙사에 살던 한국 유학생들과 여럿이 함께 모여서 점심을 먹으러 가곤 했지요. 중국 음식은 십 여명이 모여 먹으면 정말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모여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 헤어지기 섭섭하여 제 방에 몰려들어 차 한 잔 하다보면 어느새 금방 다시 저녁 시간이 되곤 했지요. 그러면 또 다시 다함께 어울려 저녁을 먹으러 가고…. 그렇게 차와 더불어 우정을 쌓아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리운 시간들입니다.
진리와 자유와 사랑의 한신대학교,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 학교에 부임해 온 지도 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기쁜 일도 많았고 슬픈 일도 많았지요. 오 천여 일을 헤아리는 기쁘고 슬펐던 그 세월, 정말로 단 하루도 차와 함께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 잔의 차와 함께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들에게 지혜로운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겸허(謙虛)의 예(禮)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동료 교수들에게서는 동명상조(同明相照)의 정신을, 후배 교수들에게서는 역동적인 변화(變化), 운명을 창조하는 힘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의 시간에도 늘 차를 마셨지요. 차를 마시며 목을 축이고, 학생들을 가르칠 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이치를 조금씩 깨달아나갔죠. 차와 함께 하는 인간 관계, 아름다운 대동(大同) 사회를 향하여…. 차는 그 모든 인간 관계에 화목(和睦)과 조화(調和)를 선물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들 삶의 벗님입니다.
선배님.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무엇일까요? 저의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많이 생각해보았지만 아직도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가장 근본이 되는 건 역시 부부 아니겠습니까? 가족 아니겠습니까? 선배님. 오늘 저녁에는 일찌감치 댁에 돌아가셔서 형수님과 함께 두 분만의 오붓한 다회(茶會)를 꾸며보심이 어떠하실 지요? 제가 드린 그 다호(茶壺), 아직 가지고 계시죠? 얼마 전에 보내드린 오룡차도 아끼지 말고 꺼내보세요.
혼자서 차를 마실 줄 알면 신령스러운 경지를 깨친 것이요, 둘이서 함께 차를 느낄 줄 알면 삶의 으뜸가는 정취(情趣)라고 들었습니다. 혼자만의 신령스러움도 좋겠지만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의 정취가 왠지 더욱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모쪼록 유가(儒家)와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정신이 하나로 합일된 마음으로, 색과 향과 맛이 모두 지극한 조화의 경지에 이른 생명의 차를 다려내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선배님 가족의 텃밭에 사랑과 낭만, 그리고 화목과 건강이 넘쳐흐르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의 나무를 두 분이 함께 정성껏 일구어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선배님. 화사한 장미꽃 다향(茶香)이 아직도 입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멀리 구름 위로 사라지는 학의 청아한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오래도록 입안에 남아있는 이 황홀한 여운을 음미하노라니 문득 제가 너무 호사스러운 삶을 사는 건 아닌지, 반성이 되는군요…. 차의 맛은 역시 다 마시고 난 후, 돌이켜보는 이 맛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선배님. 당신은, 누구…, 십니까? 차 맛의 여운을 음미하듯 지난 세월을 음미해봅니다. 싸락눈과 대나무 숲, 그리고 바람의 그 인연을 생각해봅니다…. 당신은,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한 삶의 나무, 더위에 지친 나그네의 아픔을 치유하는 싱그러운 영혼의 쉼터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지난 세월, 너무나도 못난 저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신 그 모든 분일 것입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감사 드립니다.
선배님. 당신은, 바로 곧 저 자신일 것입니다. 저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라도 늘 깨어있는 명상으로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을 뜰 수 있기를, 그리고 매사에 우주와 주파수를 함께 하고자 하는 간절한 정성을 배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어주는 생명의 차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선배님. 당신은, 바로 곧 이 글을 읽어주고 계시는 당신이십니다. 음식 하나를 먹고 마시는 작은 행위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보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신 독자 여러분, 바로 당신이십니다. 삶에 대한 그윽한 사랑으로 언제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엮어나가시는 생명의 차나무, 아름다운 당신이십니다
#차의 종류#
"선생님. 이건 무슨 차예요? 중국 차와 한국 차는 어떻게 달라요?" 가끔 학생들한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중국 사람과 한국 사람이 마찬가지 사람이듯, 차나무도 매 한 가지. 딱 하나밖에 없다. 중국이 원산지인 차의 학명은 Camellia sinensis. 동백나무과의 식물이다. 그러나 수 천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음용되다 보니, 정신이 헷갈릴 정도로 여러 가지 분류법이 있다. 그 중, 너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분류법과 설명은 생략하고 가장 일반적인 것만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첫째, 차의 모양에 따른 분류법. 잎으로 만든 잎차(葉茶)와, 가루로 만든 말차(末茶), 덩어리로 만든 떡차(餠茶, 團茶) 등이 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잎차를 마신다.
둘째, 산지(産地)에 따른 분류법. 예컨대 유명한 중국의 서호(西湖) 용정차(龍井茶), 동정(洞庭) 벽라춘(碧螺春), 몽정(蒙頂) 감로차(甘露茶), 신양(信陽) 모첨차(毛尖茶), 황산(黃山) 모봉차(毛峰茶), 군산(君山) 은침차(銀針茶), 동정(凍頂) 오룡차(烏龍茶), 안계(安溪) 철관음(鐵觀音) 등은 모두 산지의 이름을 앞에 표기한 것이다.
셋째, 색상에 따른 분류법. 가장 일반적인 분류법이다. 차는 제조 과정에서 발효를 어느 정도 시키느냐에 따라 백차(白茶), 녹차(綠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흑차(黑茶), 홍차(紅茶)로 분류된다. 그 중 제일 많이 마시는 차는 녹차와 청차, 그리고 홍차이다.
① 서구인이 즐겨 마시는 홍차는 85 % 이상 발효시킨 것으로 인도의 다즐링(dazzeling), 중국의 기문(祁門) ,스리랑카의 우바(Uva)가 세계 3대 홍차의 명산지로 손꼽힌다.
② 녹차는 차잎을 따서 바로 증기로 찌거나 솥에서 덖어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차이다. 때문에 차의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비타민 C가 레몬의 5배∼8배나 함유되어 있고, 노화 억제나 암 및 각종 성인병의 예방과 억제 효과가 있는 카테킨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나오는 차는 모두 녹차 계열이고, 중국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차 역시 녹차 계통이다.
③ 청차(靑茶)는 절반 정도 발효시킨 것으로, 15 ∼ 20 % 정도로 조금 발효시킨 포종차(包種茶)에서부터 50 ∼60% 정도 발효시킨 오룡차(烏龍茶), 철관음(鐵觀音)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청차라는 단어보다는 '오룡차'(중국어 발음은 '우롱차')로 통칭하기도 한다.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이 원산지이지만, 오늘날에는 대만 동정오룡차(凍頂烏龍茶)를 최고로 친다. 청(淸) 나라 도광(道光) 연간에 대만에 살던 선비 임봉지(林鳳池)가 무이산에서 차 씨앗을 대만으로 가져와 동정산(凍頂山) 일대에 심은 것이 그 유래다.
넷째, 차 잎의 채취시기와 찻잎의 여리고 굳은 정도에 따른 분류법. 예컨대 양력 4월 하순∼5월 상순에 채취한 녹차를 봄차 또는 첫물차라 하고, 양력 5월 하순∼6월 상순에 채취한 차를 두물차라 부르는 식이다. 또 찻잎의 여리고 굳은 정도에 따라 세작(細作,上雀) 중작(中雀) 하작(下雀) 등으로 분류한다. 작설차(雀舌茶)는 세작 중에서도 곡우(穀雨) 5일전에 딴 것을 말하는데, 잎의 싹 모양이 참새 혀 모양을 닮았다하여 중국 송나라 때의 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 외에도 차 잎에 꽃 향을 첨가한 화차(花茶)가 있다.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말리화(茉莉花), 즉 자스민을 첨가한 자스민 차를 많이 음용한다. 한편 양자강 유역의 남방에서는 녹차를 많이 음용하고, 복건(福建) 및 광동성(廣東省) 등 아열대 지역에서는 청차를 많이 마신다. 그러나 중국 대륙의 차는 녹차나 청차를 막론하고 거의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수 수준에 불과하다. 녹차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가공하지만, 청차를 제대로 가공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차 문화가 가장 발달한 대만뿐이다.
― 끝 ―